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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충렬사의 여섯 개의 문 가운데 첫째 문이다.
2개의 둥근 기둥위에 지붕 없는 붉은 살을 열지어 박아세웠다. 홍전문(紅箭門)이라 쓰고 홍살문이라 읽으며 때로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데 정2품 이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만 세울 수 있다.
 
정 문
홍살문 다음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첫 출입문이다.
삼문구조인데 양편의 협문은 출입구이고 가운데 문은 신문(神門)이라 하여 제삿날에 열어 신을 맞아들인다.
삼문 좌측의 익사(翼舍:날개)는 안내소이고 우측의 익사는 해설사 사무실이다.
내삼문(內三門) : 조선 목조건축의 정수, 삼문조형(三門造形)의 백미(白眉).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문 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의 정화(精華)이다. 솟을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혔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자는 8각 돌기둥이다.
  통용문인 양쪽 협문(夾門)을 낮게 만든 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식 맞배지붕에 겹처마이며 삼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하였고 신문 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蓮花丹靑紋樣:단청으로 그린 연꽃무늬)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제례가 시작되기 전에 헌관은 이 내삼문 단하(段下)에서 북향립(北向立:북쪽을 향하여 섬)하였다가 홀창(笏昌:제례의 순서부름)에 따라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른다. 앞 뜰에는 매년 공의 탄신제(4월 28일)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 21호인 승전무(勝戰舞)가 시연(施演)된다.
 
정 당 (正 堂)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사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宣祖: 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사를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통영충렬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여운형, 신익희 등 많은 광복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깊은 사당이며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璘:쳔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통제사의 휘필이다.
  ☞ 주련 : 고대중국의 창조신화
     經天緯地之才 (경천위지지제) : 천지창조 때 혼돈된 천지를 씨줄, 날줄로 짜세운 능력.
     浴日補天之功 (욕일보천지공) : 하늘에 뚫린 구멍을 메우고 해를 씻어 빛을 낸 공적.
 
제 단 (祭壇)
   충렬사 제단 위에는 「충무공 신위(忠武公 神位)」라고 쓰여진 밤나무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늘 붉은 비단으로 싼 독(犢 : 신주함)안에 모셔두었다가 향사 때에는 함을 열게 된다.
   정참의 천장은 보 · 도리 · 서까레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인데 바로 위패 위쪽 한 평 정도 크기의 소란반자(「井」자 무늬 널빤지)는 단청을 화려하게 칠하였다.
 
팔사품도 병풍
   명나라 신종황제가 조선과 중국을 구한 이충무공의 공적을 찬양하여 보낸 15점의 하사품을 신관호 제 187대 통제사가 그려서(1861) 정침에 비치한 것이다.
   신관호 통제사는 개화기의 명신으로 병인양요 때 공을 세우고 한일수호조약 · 한미수호조약의 조선 측 대표였으며 조선수뢰를 설계, 제작한 엘리트 무신이다.
   특히 정약용을 사숙하고 김정희(추사) 문하생으로 시 · 서 · 화에 능하였을 뿐아니라 예서체의 명필로 문무를 겸전한 통제사이다.
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 기판(記板)
   정당의 중앙문 안쪽에 걸려있다. 1795년 정조 19년(乙卯) 12월에 정조대왕이 내리신 제문(祭文)을 경상도체찰사 이태영(李泰永)이 해서로 쓴것을 목판에 오목새김한 것이다.
   가로1m10cm, 세로45cm의 나무판에 너비5cm의 테를 두르고 연화당초문을(蓮花唐草紋) 그려 단청을 하였다.
 
어제기판
   정침 서쪽문 위에 걸려있다. 정조대왕께서 내려주신(1796년 : 정조19년) 사제문과 따로 하명받은 내용을 이득제(李得濟) 제147대통제사가 해서로 써서 목판에 오목새김하였다.
   글씨가 단정하고 웅혼하다. 가로 140cm, 세로 70cm 크기의 나무판에 테를 두르고 연화당초문을(蓮花唐草紋) 그려 단청을 하였다. 이충무공의 충효에 깊히 감탄하는 정조대왕의 감회와 이충무공 제향 받드는 일 그리고 이억기와 정운의 자손에게도 충무공전서를 한 질씩 전한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이충무공의 영정
   「이순신은 우람한 장군의용모가 아니고 항상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하여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안으로는 담기가 있었다」고 유성룡의〈징비록〉이 전하고 있다. 이 영정은 정형모 화백이 그린(1978) 영정으로 1991년 여기에 봉안하였다.
 
중문(中門)
   외삼문과 내삼문의 사이에 있는 가운데 문으로 안으로 들어서면 동제와 서제가 있다.
입구 양쪽에 있는 고목은 목련과의 태산목이다.
동재(東齋)

   향사를 앞두고 헌관(獻官 : 제관)과 집사(執事)들이 미리 여기에서 몸과 마음심을 깨끗이 하고 제복을 차려입는 곳으로 향사를 끝낸후 여기에서 음복(飮福)을 한다.
   김 경 제51대통제사가 맞은 편의 서제와 동시(1670)에 건립하였다. 동·서제의 마당을 중정(中庭:가운데 뜰)이라 하는데 매년 4월 28일 탄신제 때에는 여기에서 승전무(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가 헌무(獻舞)된다.
☞ 주련
   : 盟山草木知 맹산초목지
    誓海漁龍動 서해어룡동
     산에맹세하니 초목이 알고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감동한다

 
서재(西齋)
   향사에 쓰이는 제물을 장만하고 제기(祭器)와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곳. 김 경 제51대통제사가 맞은 편의 동제와 동시(1670)년에 건립하였다.
   전시된 거북선은 전라좌수영의 거북선 모형으로 제작년대는 1950년대로 추정된다.
외삼문(外三門)
     삼문 가운데 바깥에 있는 삼문으로 앞에는 강한루가 있다. 외삼문은 좌·우의 비각과 잘 어울려 조선건축의 조형미가 빼어난 건축물로 손꼽히며 광복 후에 대한민국 우표의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제1호비각 : 충렬묘비명(忠烈廟碑銘)

   묘(廟)는 사당을 뜻하고 비명(碑銘)은 비에 새긴 글이다. 충렬묘비명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뒤에 (1861) 민섬(閔暹) 통제사가 비와 비각을 세웠다.
   글은 우암 송시렬(尤巖 宋時烈 : 효종의 스승)쓰고,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 숙종조의 영의정)이 전서체로 썼다.

 
제2호비각: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언 상(李彦祥) 사적비
   덕수이씨 충무공파의 직계손 가운데 처음으로 통제사(제70대)가 된 분으로 재임 중 (영조 21년 1754.12 - 1747.10) 선대 충무공을 본받아 군선 관리와 갑병(甲兵 : 무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존귀한 신분임에도 늘 굼누개혁에 여념이 없고 청렴결백하여 거친 음식과 낡은 옷을 탓하지 않았다.
   둔전(屯田 : 군의 자경농지)을 크게 넓혀 영의 살림을 돈독히 하고 천재를 당하면 군창을 열어 빈민구제에 솔선하여 진영의 여러 군관들이 비를 세워 그 덕을 기렸다.
   형제 세분과 아래 직계 삼대로 모두 여섯 통제사가 배출되어 가문의 중흥을 이룬 분으로 충무공과 함께 아산 현충사에 배향되어 있다.
제3호비각 : 직계후손 통제사 5위의 기념비

(좌로부터)
(1)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태 상(李泰祥) 거사비 (제121대)
(2)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한 창(李漢昌) 영세불망비 (제138대)
(3)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한 풍(李漢豊) 영세불망비 (제143대)
(4)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항 권(李恒權) 영세불망비 (제167대)
(5)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승 권(李升權) 거사비 (제172대)

*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의 관위(官位). 왕실종친과 문무관에게 줌.
 거사비(擧事碑)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는 재임의 공적을 새(嘉善大夫)긴 비.

 
제4호비각:삼도수군통제사 최 숙 사적비
   우암 송시렬 선생의 문하생으로 조선 영조조에 제70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1694.8~1695.8)하여 병선건조와 군율정비 및 충렬사 보수에 크게 힘쓰신 분이다.
   통제사로 도임한지 삼일 만에 충렬사를 참배하고 풍우(風雨)에 심히 퇴락한 사우를 다시 정비하였다.
   또 경내에 경충재(景忠齎)를 세워 영내의 문무관 자녀들에게 글과 충무공의 정신을 가르쳐 타지에 부급(負? : 유학)하지 않고도 이곳에서 면학하여 시문을 깨우침으로서 이 땅이 진실로 으름난 고장이 되었으며 이 때 세운 서당이 충의의 명문, 충렬서원이다.
   이 충렬서원은 대원군의 1.2차 서원철폐(1864. 1868) 때에도 이충무공의 사당 가운데 유일하게 제외되어 존속되었다.
제5호비각 : 삼도수군통제사 이 운 룡(李雲龍) 기실비

  재임시(1603.2~1605.9) 선조왕의 명을 받아 이 곳 통제영서문 밖에 통영충렬사를 창건(1606)하였다.
  시호는 식성군(息城君),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여 24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이충무공과 함께 함경도 시전부락전투에 참전한 바 있고 31세에 옥포만호로 재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풍비박산된 경상우수군을 재건하여 원균 우수사를 보좌하고 전라자수사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여러 해전에서 왜적을 물리쳐 크게 무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육전에서도 공을 세우 선무원종공신으로 책훈(策勳 : 공이 인정됨)되고 전란 후에는 비변사 당상관을 거쳐 제7대통제사로 제수(除授)되었다.
   문집으로는 조선수군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인 거영일기(居營日記) · 계보등록(啓本謄錄)을 남겼고 경남 의령군 기강서원(岐江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제6호비각:삼도수군통제사 유 형(柳珩) 유애비(遺愛碑)
   시호는 충경공(忠景公), 명문가 경원부사(府使) 용(溶)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살에 부친을 여의고 그리고 26세에 모친을 여의였다. 열다섯에 참의(參議) 조인(趙認)에게서 글을 배워 시문(詩文)과 사서(史書)에 통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에서 종군하였다.
이십구세에 무관별시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어 선조 임금께서 탐라말(耽羅馬 : 제주산 말)을 하사받고 진충보국(盡忠保國)하기로 맹세하였다.
   훈련도감의 파총(把摠 : 종사품의 무관)을 거쳐 해남현감이 되어 이순신 장군께서 순직하신 마지막 노량해전에 함께 참전하여 영섯발의 적탄을 맞아 모두 살아나기 힘들 것이라 하였으나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부산진첨사에 특진되고 경상우수사를 거쳐 제6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 생전에 통제사의 재목으로 낙점받은 문무겸전한 장군으로 문집으로는 석담유고(石潭遺稿)를 남겼다.
경충재(景忠齎) : 충렬서원(忠烈書院)

  제70대통제사 최 숙이 재유사(齋有司 : 관리자)를 두고 지방 청소년들에게 학문과 충의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1695년에 건립한 강당으로 충렬서원이라 불렀다.
   1865년. 1867년 두 번에 걸친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이순신 사당 가운데 유일하게 존속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지금은 공신과 집사들의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 주련
水國秋光募 수국추광모
驚寒雁陣高 경한안진고
優心輾轉夜 우심전전야
殘月照弓刀 잔월조궁도
다도해에 가을빛 저무니
찬바람에 기러기떼 높이날고
나라근심에 뒤척이는 이밤
지는달만 활과칼을 비치누나

 
숭무당(崇武堂)
   통제영에서 파견한 장교 3명이 상주하면서 사우(祠宇)와 위토전답을 관리하던 곳.
지금은 회의실과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 주련
天日成盟草木知 천일성맹초목지
閣上麒麟圖像肅 각상기린도상숙
鼓邊??鐫名休 고변과두전명휴
江山不息英雄氣 강산불식영웅기
江漢悠悠忘千秋欲慕風風 강한유유망천추욕모풍풍

하늘에 맹세하니 초목도 아는도다
기린각에 그린모습 엄숙도 한데
북가에 새긴이름 아름답구나
강산에는 영웅기상 끊임이 없도다
강한은 유유히 천년을 흐르고
경모하는 마음은 쉼없는 바람이어라
강한루(江漢樓)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 : 이충무공 8세손)이 1840년에 지은(1840) 누각.
옛부터 충렬사를 찾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누대에 올라 이 충무공의 큰 덕을 되세기며 동백 고목과 더불어 후원의 푸른 죽림을 자주 시제에 올렸던 영남 유수의 수영(水營) 누각(樓閣)이다.
  전형적 조선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정면 세칸, 측면 세칸의 익공식 이층 구조에 아래 층 뒤편에는 통용문인 「영모문」현판이 걸려있으며 이층 누마루는 우물마루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연등천장을 하고 있다.

* 강한루의 이름 유래
강한(江漢)은 중국(中國) 호북성(湖北省)의 성도(省都)무한(武漢)에 있는 地名이다.
무한(武漢)을 가로질러 흐르는 장강(長江)과 지류(支流)인 한수(漢水)가 합류하는 지역으로 장강(長江)에서 「강(江)」,한수(漢水)「한(漢)」,이두자(李)를 취하여 강한(江漢)이라 부르며 예로부터 열국이 각축하던 삼국지의 무대이며 이름난 경승지(景勝地)이다.
  이 강한(江漢)의 대안(對岸)에는 이백(李白)의 시(詩)에 등장하는 황학루(黃鶴樓)와 항주(抗州)의 서호(西湖)와 비견(比肩)되는 동호(東湖)가 있다.
  또 고대(古代) 주(周)나라 때 이곳 강한변(江漢邊)에서 소호(召虎)가 적의 항복을 받아 나라의 우환(憂患)을 씻었다는 고사(古事)가 있다.
  1840년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이 여기에 누대(樓臺)를 지을 때 시인 강위(姜偉)가 경승지 통제영과 이충무공의 위업을 이 강한의 고사에 연관지어 강한루(江漢樓)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 강위의 시 『강한루』
江 漢 樓
試溯神仙夢(시소신선몽) 重開漢上襟(중개한상금)
孤月行天遠(고월행천원) 衆流到海深(중류도해심)
逢人問古地(봉인문고지) 對酒憐初心(대주련초심)
忠烈祠堂在(충렬사당재) 天涯已再尋(천애이재심)

물길거슬러 신선의 꿈 아렸더니
강한루 다시 올라 흉금을 활짝 연다.
외로운 달 먼 하늘 떠가고
개울물 모두 흘러 깊은 바다로 가는구나.
사람만나서 옛 땅 물어보고
술 나누는 첫 마음 애닯기도 하여라.
여기 충렬사 있어
찾아온 지 벌써 두 번째렸다.!
 
동백꽃

  수령 약400년으로 추정되는 고목으로 경상남도 지정기념물 제74호(수고6.5m). 초겨울 12월부터 진홍색 꽃이 피기 시작하여 3월에 절정에 달하는데 특히 눈속에 필 때 더욱 아름답다.
동백꽃은 꽃잎이 시들기 전에 꽃봉오리 채로 낙화하는 특징이 있어 동네 아이들이 짚에 꿰어 화환을 만들어 목에 걸기도 하고 동백씨 기름은 머릿기름으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화장품과 공업원료로 쓰인다.

 
관리사무실
일반관리 : 회계 및 인사관리·사우의 유지보수
제례관리 : 제례봉행 및 제구관리
사료정보 서비스 : 임진왜란 사료 및 관련 학술강의
수목관리 : 식재·비배·구충
유물전시관 : 1981년 건립
     * 전시품 안내
어제사제문 : 정조대왕이 하사(1795).
충렬사팔사품 : 명나라 황제가 보냄. (보물440호)
이충무공전서 : 통제영수군 파총. 정효현의 그림.
통제영수조도 : 통제영수군 파총. 정효현의 그림.
통제영지도 : 삼도수군통제영의 모항(19세기).
총 통 : 지자총통·현자총통
약수 돌거북
전적류 : 충의고적. 명정서당기. 유영사례
우표 : 외삼문 전경.
 
현자총통 (玄字銃筒)

보물제885호(1986.11.29 지정)
제작시대 : 1596년 (선조 29년)
길이 : 70cm
구경 : 75mm
중량 : 50kg

 
지자총통 (地字銃筒)
보물제862호(1986.3.14 지정)
제작시대 : 1577년 (명종 2년)
길이 : 89.5cm
구경 : 105mm
중량 : 73kg
   당시 세계최강 영국해군의 함포는 연철(鉛鐵)로 총구를 만들어 적중률이 떨어졌으나 조선총통은 주물로 부어 만들어
   정확도가 우수하였다.
어제사제문(忠烈祠 御賜祭文) :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지어 내리신(1795) 제문.
  정조(正祖)대왕께서 충무공의 우국충절과 훈공을 만백성이 알게 하기 위하여 국가사업으로 임진왜란 사료를 정리하여 이충무공전서를 편찬, 발간하여 통제사 이득제(李得濟:제174대)에게 한질을 내려보내면서 통영충렬사에 한질을 봉안하고 엄숙히 법도를 갖추어 충무공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자세히 지시한 제문이다.

지시내용 : 전서를 한질 보내니,
(1)명황제가 보낸 팔사품을 사당에 진렬하고 또 독대·총통·피리·북 등을 사당 안팎의 적당한 장소에 놓고
(2)위패 앞에 술과 고기를 차리고 투구와 갑옷을 입은 채로
(3)유명수군도독·조선국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대강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겸 영경련·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덕흥부원군·행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충무공 이순신에게 정성을 다하여 잔을 올리고 이 한질을 봉안하라.
(4)충무공을 알고저 하는 자는 빛나고 찬란한 이 전서를 보아라.
싸우던 공적이며 변화치던 형세와 거북같은 배와 기러기 울던 물가에서 진린(陳璘)·등자룡(鄧子龍)과 더불어 전라·경상에 진을 치고 바다와 산에 맹세할 제 초목도 그 이름을 알았더니라.

 
충렬사팔사품(忠烈祠八賜品) : 총8품15점
  명의 수군도독 천린(陳璘)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명황제에 보고하자 명의 신종(神宗)이 그 전공을 치하하여 보내준 포상물이다.
  장군의 의장물로서 통제사가 높은 장막(帳幕)위로 오르면 측근인 비장(裨將) 두 사람이 우립(羽笠)을 쓰고 홍첩리(紅帖裏)를 입고 어깨에 영패를 메고 선다.
그리고 네 사람의 군관(軍官)이 귀도와 참도를 각각 어깨에 메고 독전기(督戰旗).
홍소령기(紅小令旗)·남소령(藍小令旗)를 들고서 앞에 갈라선다.
팔사물·팔사품 또는 명조팔사품 등 여러 개의 명칭으로 불리어 왔는데 1966년 문화관광부에서 보물 제440호 「통영충렬사 팔사품」으로 명명(命名),지정하였다.